10초만에 금은방 털었지만, 귀금속 다 흘리고 도망간 도둑 체포

1월 13일 오전 2시 39분경 A씨는 화청시 펑탄향 금·은방 유리문을 망치로 부수고 선반에 있는 귀금속을 훔친 혐의를 받았다.

 

A씨는불과 10초 만에 금은방의 문과 진열대를 망치로 부수고 귀금속을 훔쳤지만, 보안경보에 쫓기듯 가다 종이 봉지가 찢어지고 떨어드리고 그대로 도주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안업체로부터 신고를 받은 경찰은 14일 오후 5시45분쯤 안산시 상구의 한 모텔 앞에서 A씨의 휴대전화 기록과 도주경로를 추적해 A씨를 발견했다. 

 

A씨는 또래들과 같은 숙소에서 지내며 절도 등 혐의로 30여 차례 검거된 이력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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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스러져간 비극의 다리, 그곳의 현재

여러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이 다리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돌다리 중 축조 연대가 명확히 밝혀진 가장 오래된 다리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전설에 따르면 이 다리는 1273년 고려 원종 시절, 법천사의 고막대사가 도술을 부려 놓았다고 전해진다. 75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수많은 홍수와 자연재해를 견뎌냈으며, 최근의 기록적인 폭우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 그 견고함을 증명했다. 투박한 외형과 달리, 마치 두부를 자르듯 거대한 돌을 자유자재로 다듬어 서로 맞물리게 한 선조들의 건축 기술이 돋보인다.과거 이 다리는 함평과 나주를 잇는 유일한 통로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길이었다.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의 희망과, 괴나리봇짐을 멘 상인들의 땀방울이 이곳에 스며있다. 한때는 소금과 생선을 실은 배가 드나들던 큰 포구였고, 쌀을 가득 실은 우마차가 다닐 만큼 넓고 튼튼했지만 영산강 하굿둑 건설 이후 옛 모습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고막천은 단지 만남과 희망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나주성 공략에 실패하고 퇴각하던 농민군이 관군에 쫓겨 이곳까지 밀려왔다. 하필 밀물 때라 강을 건너지 못한 수많은 농민군이 힘없이 스러져간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의 참상을 말없이 지켜봤을 200년 수령의 팽나무가 지금도 천변에 서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원래 20미터가 넘는 길이를 자랑했으나, 일제강점기 보수 과정에서 홍수로 3분의 2가량이 유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는 남아있는 옛 돌다리에 콘크리트 다리가 이어져 본래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는 상태다. 다리를 놓았다는 고막대사의 이름에서 유래한 고막마을과, 고려 시대 관원들의 쉼터였던 고막원의 흔적이 다리 주변에 남아있다.오늘날 고막돌다리 주변은 주민과 방문객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가꿔져 있다. 천변을 따라 단아한 산책로가 조성되었고, 한 주민이 기부한 땅 위에 지어진 ‘고막정’이라는 정자가 운치를 더한다. 또한, 2005년 함평 지역 폭설 피해 복구를 돕고 돌아가다 순직한 공무원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의미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