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톡 스타' 된 손녀부터 '암호화폐 사업가' 된 아들까지"...트럼프가의 8년

 4년 만의 백악관 복귀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일가가 8년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가족 구성원들의 역할과 위상이 크게 변화했으며, 성장한 자녀들의 달라진 면모가 눈길을 끈다.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인물은 장녀 이방카 트럼프(43)다. 2016년 대선 승리의 주역이자 백악관 선임고문으로 활약했던 그녀는 이번에는 완전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남편 재러드 쿠슈너와 함께 플로리다 자택에서 조용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방카의 행보는 8년 전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반면 트럼프의 세 아들은 더욱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 장남 트럼프 주니어(46)는 이번 대선에서 J.D. 밴스 부통령 당선인을 직접 추천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이 한층 강화됐다. 현재 트럼프 정권 인수팀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며 인선 과정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차남 에릭(40)도 인수팀 명예 회장을 맡아 형과 함께 정치·사업 양면에서 부친을 보좌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암호화폐 플랫폼 사업에도 진출했다.

 

차녀 티파니(31)는 여전히 공개적인 활동은 자제하고 있지만, 그녀의 시아버지인 마사드 불로스가 차기 행정부의 아랍·중동 문제 선임고문으로 지명되면서 가문의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변화는 트럼프의 막내아들 배런(18)이다. 2017년 첫 취임 당시 축구를 좋아하던 10살 소년이었던 그는 이제 206cm의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아버지의 키(190cm)를 훌쩍 뛰어넘은 배런은 이번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젊은 유권자층 공략 전략을 조언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트럼프 당선인이 출연할 팟캐스트를 직접 추천하는 등 미디어 전략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손녀 카이(17)의 변신도 눈부시다. 초등학생이었던 그녀는 이제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로 성장했다. 할아버지의 선거 현장을 담은 영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지난해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첫 대중 연설을 하며 정치적 입지도 다져가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과 함께 골프를 즐기는 등 가족 간의 친밀한 모습도 SNS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이처럼 8년이라는 세월은 트럼프 가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의 주역이었던 이방카가 물러난 자리를 아들들이 채우고, 어린아이였던 막내 자녀와 손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성장하며 새로운 트럼프 왕조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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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에 핀 고려의 꿈…개태사 왕건 동상의 비밀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 말기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무대이기도 하다.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지는 형상 때문에 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 일대는 한반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명을 내려 창건한 국가적인 사찰이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기나긴 전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부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여겨 산의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으로 바꾸고,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4년의 대공사 끝에 개태사를 완공했다. 이후 이 사찰은 약 450년간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에 안치된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있는 독특한 의좌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양식이다. 개태사 어진전의 왕건 동상이 이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그가 전란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태평성대를 이끄는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개태사 곳곳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단정하고 안정적인 비례미를 보여주는 오층 석탑과 더불어, 사찰 창건 당시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무쇠 솥인 철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철확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박람회에 전시되는 등 숱한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물로, 개태사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극락대보전에 모셔진 장중한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고려 초기 새 왕조의 강인한 기상과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고려 왕실의 상징이었던 개태사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폐사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랜 세월 텅 빈 벌판으로 방치되었던 절터는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옛터의 중심부에 사찰을 다시 세우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개태사의 규모는 과거 화려했던 고려 시대의 도량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사찰 주변의 넓은 농경지와 마을 땅속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려 시대 개태사의 거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오랜 세월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개태사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빛바랜 안내판은 1960년대 초 개태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외부로 유출된 국보 금동대탑의 반환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한 사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에 대해 사찰 측은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법원은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개태사의 옛터에서 출토된 핵심 유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역 사회의 역사적 자긍심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