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도' 실명 가능...안과 전문의의 '충격 경고'

 최근 젊은 층에서도 시력 상실 사례가 증가하면서 의료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디지털 기기 사용 증가와 생활습관 변화로 인해 과거에는 중년 이후에 주로 발생하던 안과 질환들이 젊은 연령대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 주목된다.

 

가장 심각한 질환 중 하나인 망막박리는 최근 발병 연령이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스마트폰 사용 증가로 인한 근시 인구 증가가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다. 특히 근시가 심할수록 안구가 길어져 망막이 얇아지는데, 이는 망막박리의 직접적인 위험 요인이 된다. 초기에는 눈앞에서 반짝이는 섬광이나 떠다니는 물체가 보이는 비문증으로 시작되지만, 방치하면 시야가 가려지는 심각한 증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눈을 자주 비비는 습관이 망막박리를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토피 환자들의 망막박리 발생률이 일반인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황반원공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핵심 부위인 황반에 구멍이 생기는 질환으로, 특히 고도 근시 환자들에게서 발병 위험이 높다. 초기에는 증상이 거의 없어 발견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진행되면 중심 시야가 흐려지거나 물체가 찌그러져 보이는 등 심각한 시야 장애가 발생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쪽 눈에 발생하면 반대쪽 눈에도 발생할 확률이 최대 22%에 달한다는 점이다.

 


황반변성은 완치가 어렵고 재발률이 높은 질환으로, 최근에는 젊은 층에서도 발병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흡연자의 경우 발병 위험이 2배 이상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주목된다. 니코틴이 황반으로 가는 산소 공급을 방해하고 황반의 색소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자외선 노출과 고열량 식단도 주요 위험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당뇨망막병증은 특히 제1형 당뇨병 환자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초기에는 증상이 거의 없어 발견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진행될 경우 심각한 시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당뇨와 고혈압이 동반될 경우 증상이 급격히 악화될 수 있으며, 임신 중에는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최근에는 안내주사 치료법이 개발되어 황반부종 동반 시에도 효과적인 치료가 가능해졌다.

 

의료계에서는 이러한 질환들의 예방과 조기 발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젊은 층에서도 정기적인 안과 검진이 필수적이며, 디지털 기기 사용 시간 조절과 올바른 생활습관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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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에 핀 고려의 꿈…개태사 왕건 동상의 비밀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으로, 백제 말기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역사적 무대이기도 하다. 산봉우리가 길게 이어지는 형상 때문에 연산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 일대는 한반도 고대사와 중세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중요한 공간이다.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직접 명을 내려 창건한 국가적인 사찰이다. 936년 왕건은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제압하며 기나긴 전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부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으로 통일을 이루었다고 여겨 산의 이름을 하늘이 보호한다는 뜻의 천호산으로 바꾸고, 태평성대가 열리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4년의 대공사 끝에 개태사를 완공했다. 이후 이 사찰은 약 450년간 고려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번영을 누렸다.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전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에 안치된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있는 독특한 의좌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불교 미술에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이는 양식이다. 개태사 어진전의 왕건 동상이 이 같은 자세를 취한 것은 그가 전란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준 구원자이자 태평성대를 이끄는 군주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개태사 곳곳에는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있다. 고려 초기의 단정하고 안정적인 비례미를 보여주는 오층 석탑과 더불어, 사찰 창건 당시 승려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름 3미터 크기의 거대한 무쇠 솥인 철확이 눈길을 끈다. 특히 철확은 사찰이 폐허가 된 후 홍수에 떠내려가거나 일제강점기 시절 박람회에 전시되는 등 숱한 수난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유물로, 개태사의 굴곡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극락대보전에 모셔진 장중한 규모의 석조여래삼존입상 역시 고려 초기 새 왕조의 강인한 기상과 호국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다.고려 왕실의 상징이었던 개태사는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억불숭유 정책의 여파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폐사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오랜 세월 텅 빈 벌판으로 방치되었던 절터는 1934년에 이르러서야 옛터의 중심부에 사찰을 다시 세우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재 복원된 개태사의 규모는 과거 화려했던 고려 시대의 도량에 비하면 턱없이 작지만, 사찰 주변의 넓은 농경지와 마을 땅속에는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려 시대 개태사의 거대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오랜 세월을 거치며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개태사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빛바랜 안내판은 1960년대 초 개태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외부로 유출된 국보 금동대탑의 반환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한 사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유물에 대해 사찰 측은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1년 법원은 소유권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한 바 있다. 개태사의 옛터에서 출토된 핵심 유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역 사회의 역사적 자긍심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논의가 필요한 사안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