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아역'의 마지막 가는 길... 25살 김새론이 우리에게 남긴 것

 한국 영화계의 '천재 아역'으로 불렸던 배우 김새론이 25세라는 너무도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19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 발인식에는 생전 그와 가깝게 지냈던 배우 김보라, 에이비식스의 박우진 등이 참석해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성동구 자택에서 발견된 김새론의 비보는 연예계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빈소에는 영화 '아저씨'에서 호흡을 맞췄던 원빈을 비롯해 한소희, 악동뮤지션의 이찬혁·이수현, 방송인 장성규 등 수많은 연예계 동료들이 찾아와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SNS에서도 김옥빈, 서예지, 전효성, 홍석천, 이종혁 등 많은 스타들이 국화꽃 사진과 함께 애도의 뜻을 전했다.

 

2001년 잡지 '앙팡'의 아역 모델로 데뷔한 김새론은 2009년 영화 '여행자'를 통해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한국·프랑스 합작 영화 '여행자'는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이를 통해 김새론은 한국 최연소로 칸 레드카펫을 밟는 영광을 안았다. 이어 '아저씨', '도희야' 등에서 보여준 뛰어난 연기력으로 '천재 아역'이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한국 영화계의 미래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2022년 5월 음주운전 사고를 일으키며 그의 연예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출연 예정이었던 드라마 '트롤리'에서 하차했고, 넷플릭스 시리즈 '사냥개들'에서는 그의 분량이 대폭 축소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최근 연극 '동치미'로 2년 만의 복귀를 시도했으나, 논란이 일자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를 결정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 '기타맨'으로 남게 되었다.

 

한국연예인자살예방협회 권영찬 소장은 빈소에서 고인의 부친과 나눈 대화를 통해, 사생활을 다룬 유튜버들의 영상이 고인에게 큰 심적 부담이 되었다고 전했다. 협회는 향후 관련 유튜버들에 대한 고발과 언론중재위원회 제소 등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연예인을 향한 과도한 악성 댓글과 무분별한 사생활 보도가 한 젊은 예술인의 생명을 앗아갔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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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살던 궁궐이 일본인 아이들 놀이터로…충격적인 경희궁의 민낯

수행하며 역사의 중심에 섰던 서궐(西闕)의 위용은 간데없고, 현재는 이름에 터만 남았다는 의미의 ‘경희궁지(慶熙宮址)’로 불리며 도심 속 공원으로 인식될 뿐이다. 복원이 시작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정전인 숭정전 일대를 제외하면 드넓은 잔디밭이 옛 건물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어 궁궐의 고유한 정체성마저 희미해졌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명성에 가려져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이 비운의 궁궐은, 그 황량한 터 곳곳에 식민과 분단의 아픔, 그리고 권력의 무상함이 새겨진 우리 근현대사의 축소판과도 같은 공간이다.경희궁이 겪은 수난의 역사는 궁궐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의 기구한 여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본래 동쪽을 바라보며 위엄을 뽐내던 흥화문은 일제강점기,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 박문사의 정문으로 팔려나가는 치욕을 겪었다. 심지어 그 위치는 명성황후 시해에 항거하다 순국한 이들을 추모하던 장충단 바로 곁으로, 조선의 국왕이 드나들던 문을 민족의 원수를 기리는 공간의 입구로 삼아 왕실의 존엄을 철저히 짓밟은 것이다. 해방 후 박문사가 헐리고 그 자리에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호텔 영빈관의 문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경희궁 복원 사업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궁궐터의 상당 부분이 도시에 편입된 후라 원래의 자리를 되찾지 못하고 엉뚱한 도로변에 세워지며 뒤틀린 역사의 상흔을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궁궐 내부의 훼손은 더욱 처참했다. 경희궁 터에는 식민지 시기 일본인 자녀를 위한 경성중학교가 들어섰고, 궁궐의 심장부인 숭정전은 교사로, 너른 궁궐터는 아이들의 운동장으로 전락하며 왕조의 상징적 공간은 완벽히 능욕당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현재 경희궁에 복원된 숭정전이 원본이 아닌 복제품이라는 점이다. 진짜 숭정전 건물은 일제강점기 일본 사찰에 팔렸다가 해방 후 동국대학교 교내에 그대로 남아 현재 ‘정각원’이라는 이름의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왕의 어좌가 놓여있던 가장 존엄한 공간에 불상이 모셔진 모습은 경희궁이 겪어야 했던 역사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지붕 위 잡상들만이 이곳이 한때 궁궐의 정전이었음을 희미하게 알릴 뿐, 본래의 위엄을 잃어버린 채 이질적인 공간으로 남은 것이다.경희궁의 파괴가 오직 일제의 만행 탓만은 아니라는 점은 우리를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왕실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을 중건하던 흥선대원군은 경희궁의 수많은 전각을 헐어 그 자재를 사용했으며, 이는 아랫돌을 빼 윗돌을 괴는 어리석은 행위였다. 여기에 일제는 패망 직전 미군의 폭격에 대비한 거대한 방공호까지 건설하며 궁궐터를 군사 시설로 이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늘날에도 궁궐터에는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특별시교육청 건물이 버티고 서 있어 완전한 복원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잊힌 궁궐 경희궁은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잃고, 외세와 내부의 요인으로 철저히 파괴된 채 우리에게 진정한 역사 복원이란 무엇인지 무겁게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