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연기냐 검은 연기냐... 교황 선출의 '화학적 비밀' 공개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수장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신비로운 선거 과정 중 하나다. 7일 시작된 이번 콘클라베에서도 전 세계 신자들과 언론은 시스티나 성당 지붕 위 작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색깔에 주목하고 있다. 흰 연기는 새 교황의 탄생을, 검은 연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신호다.

 

콘클라베에 참여하는 전체 추기경 133명 중 3분의 2 이상인 89명의 지지를 받아 새 교황이 선출될 경우, 시스티나 성당 지붕 위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반면 투표 후 교황이 선출되지 않았다면 검은 연기를 피워 아직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전 세계에 알린다.

 

이 독특한 전통의 역사는 생각보다 깊다. 색이 있는 연기로 교황 선출 소식을 알리는 관행은 19세기 무렵부터 정착되었다. 초기에는 단순히 연기만 피워 올려 선출 소식을 알렸으나, 이는 종종 혼란을 야기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군중들은 연기의 색을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웠고, 이로 인해 잘못된 정보가 퍼지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부터는 화학 혼합물을 첨가해 흰색과 검은색 연기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헐 대학교의 마크 로치 과학커뮤니케이션과 화학 교수는 독립뉴스매체 '더컨버세이션'을 통해 이러한 변화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시스티나 성당에는 원래 굴뚝이 없다는 사실이다. 콘클라베가 열릴 때만 임시로 굴뚝 하나를 설치하는데, 이는 미켈란젤로의 명작 '천지창조'를 비롯한 성당 천장의 귀중한 예술작품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호주 가톨릭대의 클레어 존슨 전례학·성사신학 교수에 따르면, 투표지 소각은 최소 1417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시스티나 성당에 굴뚝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약 18세기부터라고 한다.

 


굴뚝에는 두 개의 난로가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투표용지와 메모지를 태우는 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연기의 색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이 두 난로의 연기가 합쳐져 굴뚝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구조다.

 

2013년 교황청이 공개한 '연기 조리법'은 과학적으로도 흥미롭다. 검은 연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탄소 성분이 완전히 연소되지 않도록 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구체적으로는 산화물질인 과염소산칼륨(KClO₄)과 연료 역할을 하는 콜타르(석탄·코크스를 가열해 얻는 끈적한 검은 액체) 성분의 안트라센, 그리고 연소 속도와 온도를 조절하기 위한 유황을 혼합하여 태운다. 이 과정에서 불완전 연소가 일어나 그을음이 발생하고, 이것이 검은 연기를 만들어낸다.

 

반면 흰 연기는 과염소산칼륨보다 산화 반응성이 좋은 염소산칼륨(KClO₃)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유황 대신 유당(우유에 함유된 당분)과 흰색 가루인 소나무 송진, 클로로포름 수지 등을 혼합하여 가열하면 짙은 흰색 연기가 발생한다. 이 화학적 조합은 완전 연소를 촉진하여 그을음 없이 깨끗한 흰 연기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현대 과학과 수백 년 된 전통이 결합된 교황 선출 과정은 가톨릭교회의 역사와 현대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의식으로 남아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단순한 신호를 넘어, 교회의 오랜 전통과 과학적 혁신이 만나는 상징적인 순간이 되었다.

 

전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들과 많은 비신자들까지도 이 작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의 색깔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화학 반응을 넘어 교회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백색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세계는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 우리에게 교황이 있다)"이라는 선언과 함께 새로운 교황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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