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코비치가 극찬했던 '천재의 추락'…랭킹 161위 선수에 완패 후 고개 숙인 정현

 한때 한국 테니스의 희망으로 불렸던 정현의 복귀전은 아쉬움 속에 막을 내렸다. 그는 27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유진투자증권 서울오픈 챌린저대회 단식 1회전에서 홍콩의 콜먼 웡에게 세트 스코어 0-2로 완패하며 조기 탈락의 쓴맛을 봤다.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수많은 홈 팬들의 기대감은 이내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경기 후 정현은 "원하는 경기력을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잔실수가 많았다는 자평과 함께, 이제는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들을 통해 시즌을 마무리하고 동계 훈련으로 내년을 기약하겠다는 계획을 담담히 밝혔다. 이날의 패배는 단순히 1패 이상의 무게로 다가왔으며, 한국 남자 테니스가 이번 대회 단식 1회전에서 전원 탈락하는 아픔과 맞물려 더욱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불과 7년 전, 정현은 한국 테니스 역사의 새 장을 연 기적의 아이콘이었다. 2018년 호주오픈에서 그는 세계 테니스계를 경악시키며 한국 선수 최초로 메이저대회 단식 4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특히 16강전에서 당시 '최강'으로 군림하던 노박 조코비치를 3-0으로 완파한 경기는 전설로 회자된다. 그의 압도적인 경기력에 조코비치마저 "놀라운 수준이다. 세계 랭킹 톱10에 들 잠재력을 가졌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였다. 탄탄한 기본기와 지칠 줄 모르는 체력, 강철 같은 정신력으로 무장한 그의 등장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테니스의 미래를 짊어질 재목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하지만 영광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정상의 문턱에서 그를 가로막은 것은 상대 선수가 아닌 고질적인 허리 부상이었다. 2020년 프랑스오픈 예선 탈락을 기점으로 그의 커리어는 기나긴 부상의 터널로 접어들었다. 잠시 코트에 복귀했다가도 재발하는 허리 통증에 번번이 좌절해야 했다. 2022년 코리아오픈 복식 경기 중 통증이 재발해 코트를 떠났고, 2023년 윔블던 예선 탈락 이후에는 부상이 악화되어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재활에만 매달려야 했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천재의 이름은 팬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갔고, 그의 랭킹은 3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기나긴 공백을 깨고 지난해 9월, 그는 챌린저보다 한 등급 낮은 퓨처스 대회를 통해 힘겨운 복귀의 첫발을 뗐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대신 낯선 코트에서 묵묵히 포인트를 쌓아 올리며 재기를 노렸다. 지난 4월 광주오픈 챌린저에서 8강에 오르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듯했지만, 이번 서울오픈에서의 완패는 그의 현재 위치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여전히 멀고 험난하다는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주었다. 한때 세계 정상을 꿈꿨던 천재는 이제 부상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 다시 한번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여행핫클립

왕이 살던 궁궐이 일본인 아이들 놀이터로…충격적인 경희궁의 민낯

수행하며 역사의 중심에 섰던 서궐(西闕)의 위용은 간데없고, 현재는 이름에 터만 남았다는 의미의 ‘경희궁지(慶熙宮址)’로 불리며 도심 속 공원으로 인식될 뿐이다. 복원이 시작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정전인 숭정전 일대를 제외하면 드넓은 잔디밭이 옛 건물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어 궁궐의 고유한 정체성마저 희미해졌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명성에 가려져 대중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이 비운의 궁궐은, 그 황량한 터 곳곳에 식민과 분단의 아픔, 그리고 권력의 무상함이 새겨진 우리 근현대사의 축소판과도 같은 공간이다.경희궁이 겪은 수난의 역사는 궁궐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의 기구한 여정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본래 동쪽을 바라보며 위엄을 뽐내던 흥화문은 일제강점기,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 박문사의 정문으로 팔려나가는 치욕을 겪었다. 심지어 그 위치는 명성황후 시해에 항거하다 순국한 이들을 추모하던 장충단 바로 곁으로, 조선의 국왕이 드나들던 문을 민족의 원수를 기리는 공간의 입구로 삼아 왕실의 존엄을 철저히 짓밟은 것이다. 해방 후 박문사가 헐리고 그 자리에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호텔 영빈관의 문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경희궁 복원 사업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궁궐터의 상당 부분이 도시에 편입된 후라 원래의 자리를 되찾지 못하고 엉뚱한 도로변에 세워지며 뒤틀린 역사의 상흔을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궁궐 내부의 훼손은 더욱 처참했다. 경희궁 터에는 식민지 시기 일본인 자녀를 위한 경성중학교가 들어섰고, 궁궐의 심장부인 숭정전은 교사로, 너른 궁궐터는 아이들의 운동장으로 전락하며 왕조의 상징적 공간은 완벽히 능욕당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현재 경희궁에 복원된 숭정전이 원본이 아닌 복제품이라는 점이다. 진짜 숭정전 건물은 일제강점기 일본 사찰에 팔렸다가 해방 후 동국대학교 교내에 그대로 남아 현재 ‘정각원’이라는 이름의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왕의 어좌가 놓여있던 가장 존엄한 공간에 불상이 모셔진 모습은 경희궁이 겪어야 했던 역사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지붕 위 잡상들만이 이곳이 한때 궁궐의 정전이었음을 희미하게 알릴 뿐, 본래의 위엄을 잃어버린 채 이질적인 공간으로 남은 것이다.경희궁의 파괴가 오직 일제의 만행 탓만은 아니라는 점은 우리를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왕실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을 중건하던 흥선대원군은 경희궁의 수많은 전각을 헐어 그 자재를 사용했으며, 이는 아랫돌을 빼 윗돌을 괴는 어리석은 행위였다. 여기에 일제는 패망 직전 미군의 폭격에 대비한 거대한 방공호까지 건설하며 궁궐터를 군사 시설로 이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늘날에도 궁궐터에는 서울역사박물관과 서울특별시교육청 건물이 버티고 서 있어 완전한 복원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잊힌 궁궐 경희궁은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잃고, 외세와 내부의 요인으로 철저히 파괴된 채 우리에게 진정한 역사 복원이란 무엇인지 무겁게 묻고 있다.